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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칼럼 자연

산 너머에 한 집이 있다

오래된 풍경과 기억을 따라가는 하이쿠 산문입니다.

자연 필자 오기석 2026.04.28 조회 80
산 너머에 한 집이 있다
산 너머에 한 집이 있다.
이 문장은 지금의 내가 만든 문장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내 안에 남아 있던 하나의 풍경이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을 벗어나면, 자그마한 산길이 시작된다. 사람의 발이 자주 닿지 않은 길이라기보다, 오히려 기억이 먼저 지나가 버린 듯한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 너머에 한 채의 집이 있다.

그 집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는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사과, 복숭아, 그리고 배나무들. 특히 봄이 되면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길 위로 흰 빛을 흘린다. 땅 위에 쌓인 꽃은 꽃이라기보다 빛에 가깝다. 발을 디딜 때마다 현실이 아니라 시간 위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산 너머
배꽃 흰 길 위로
달 넘어간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사실은 이 모든 풍경의 압축이다. 길, 꽃, 달.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온 사람들의 시간.

그 집은 외가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외삼촌 집, 나에게는 외삼촌 할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나 이름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늘 “길”이다. 집보다 길이 먼저 기억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그런 장소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 집 이야기를 종종 했다. 어린 남동생의 손을 잡고 그 집으로 향하던 늦은 봄날의 저녁. 외삼촌의 과수원 집은 풍족했지만, 삶은 늘 바빴고 사람들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움직였다. 웃음은 많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언제나 생활의 무게가 함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알게 되었다. 그곳은 단순한 외가가 아니라, 한 시대의 생활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였다는 것을.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늘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길 위에는 늘 사람이 있었고, 말이 있었고,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지금의 언어로는 다 담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짧은 문장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하이쿠라는 형식으로.

산 너머 한 집
모래도 희다 배꽃
넘어가는 달

이 시는 한 장면이 아니라, 여러 시간의 층이 겹쳐진 결과물이다. 모래는 땅이지만 동시에 시간이고, 배꽃은 풍경이지만 동시에 기억이며, 달은 하늘이지만 동시에 지나간 삶이다.

아버지의 이야기도 그 속에 있다. 삶이 기울어 다시 돌아와야 했던 시간, 가족이 흩어지고 다시 붙어야 했던 시간. 그리고 어머니가 그 모든 시간을 견디며 지나온 자리.

한때 나는 황토 골방에 앉아 어둠을 바라보던 아이였다. 그때의 나는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 속에 있었다. 그 감정들은 말이 되지 못하고, 자개장 거울 속으로 흘러내리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기억들이 결국 하나의 풍경으로 남는다는 것을.

산길을 걷는다.
길은 짧지만, 생각은 길어진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우리가 지나온 것은 길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것을.

산 너머
배꽃 흰 길 위로
달 넘어간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고, 이제는 흰 머리칼이 달빛처럼 쌓인 지금. 나는 다시 그 길을 떠올린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장소로서.

남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잔상이다.
그리고 그 잔상 속에서 조용히 넘어가는 하나의 달.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외가이고, 어머니이고, 그리고 나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