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 두 사람
물 따르는 그 소리
작은 산 하나
무릎 수술을 앞두고 꼭 보고 싶은 연극이 있었다.
《코카서스 백묵원》.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날들이었다.
하루하루가 슬픔으로 가득했고, 누워 있던 시간은 몸에 각질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때 새벽에 필사를 하며 만난 문장이 있었다.
“작가의 첫 아침은 개나리 같더라. 겨울은 잠깐 봄꽃에 물려났다.”
그 문장을 붙잡았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내게도 봄꽃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연극을 보러 갔다.
무대 뒤로 산이 걸리고
길게 늘어진 흰 천은 물길을 낸다.
그루쉐가 빨래를 한다.
해가 뜰 때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달이 흘러갈 때마다 새소리에 지저귀듯 그의 목소리를 그린다.
그러나 그리움은 사람을 기다리게만 하지 않는다.
아이를 품에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한다.
쫓기는 몸으로 또 걸어야 한다.
그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나는 그루쉐를 보며 내 무릎을 생각했다.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었던가.
아픈 무릎으로 몇 걸음 걷는 일이 하루의 큰일이 되어버린 나에게, 무대 위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그루쉐의 발걸음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가까웠다.
낮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고요 속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남자가 찾아왔다.
시몬이었다.
마주 선 두 사람.
마디가 굵어졌다.
손마디가?
서로의 손마디가!
흰 물결을 사이에 두고 남녀는 그리움과 반가움에 소리친다.
그러나 시간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사랑을 키우지만, 돌아온 뒤에는 서로 사이에 강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리움이 그리움만 키웠구나.”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사랑도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움은 때로 그리움만 키운다.
사람이 돌아왔는데도 그 사람이 떠나 있던 시간까지 함께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아이가 문제의 중심에 선다.
어린아이를 원 안에 두고 두 어머니가 아이의 양팔을 잡아당긴다.
아이를 버리고 도망갔던 어머니는 아이를 세게 끌어당긴다.
아이를 키운 어머니는 아이가 다칠까 염려하여 손을 놓아버린다.
재판관은 손을 놓은 어머니에게 아이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아이를 차지하기 위해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손을 놓을 수 있었던 사람이 진짜 어머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한동안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붙잡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놓아주는 데서 비로소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붙잡고 있던 것이 많았다.
무대.
춤.
연극.
그리고 걷는 몸.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까지 함께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무릎 수술을 앞두고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예전처럼 걸을 수 없으면 어쩌나.
다시 무대에 설 수 없으면 어쩌나.
내가 오래 꿈꾸어 온 것들을 이제는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코카서스 백묵원》의 그 장면을 보았다.
원 안의 아이를 향해 두 사람이 당기고 있었다.
한 사람은 끝까지 붙잡았고
한 사람은 아이가 다칠까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 있고,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것이 있다.
놓는다고 해서 반드시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놓아야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픈 무릎과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했다.
그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봄을 맞기 위해 지나야 하는 겨울인지도 몰랐다.
새벽에 필사했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작가의 첫 아침은 개나리 같더라.
겨울은 잠깐 봄꽃에 물려났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섰다.
아직 내 무릎은 아팠고, 내가 다시 걸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에서 작은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그루쉐는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이를 지켜야 할 길이 있었고,
나에게는 다시 걸어야 할 길이 있었다.
어쩌면 사람은 자기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걷기 시작하면서 길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앉은 두 사람
물 따르는 그 소리
작은 산 하나
그날 나는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극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산을 넘어
다시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움이 그리움만 키운 시간 끝에서
나는 이제
그리움을 삶으로 옮겨놓아야 했다.
손을 감추고
먼 산을 바라보네
자반 고등어
_ 여주 무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