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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30513_022238154.jpg  <섬노루귀>

 

한국하이쿠연맹

사무처장/문학박사 김수성

 

우리 기억에 새겨질 정도로 무더웠던 여름도 저 멀리 뒤로하고 수목들도 울긋불긋 단풍을 뽐내는 계절을 맞이한 지도 얼마되지 않아 이제 겨울의 문턱에 서 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이 가져다 주는 귀한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주변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감동을 아름다운 우리의 한글로 5음절, 7음절, 5음절의 짧은 시에 담아내는 것이 바로 한국하이쿠다.

한국하이쿠를 더 쉽게 표현하자면 일상 속에서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고 공유하는 실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한국하이쿠는 나이도 자격도 국적도 어떠한 제한이 없고 종이 한 장 연필 한자루, 아니면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여도 좋고, 이조차 준비되지 않았다면 몇 개의 단어 나열만으로도 작품을 생산할 수 있다.

흔히 사물이라 말할 때 세상에는 형태가 없는 사()와 형태가 있는 물()이 존재한다. 형태가 있는 것은 설명이나 묘사를 해서 독자에게 이해시킬 수가 있지만, 형태가 없는 것은 이해시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사()를 물()의 형태를 빌려서 표현하고자 하는데, 즉 물()의 모습을 통해 그 뒷면에 있는 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방법이 선택되게 된다. 가령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다등의 표현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국하이쿠는 극단적으로 짧은 형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말로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작자의 마음의 내용-희노애락의 감정이나 여러 가지 심리-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자신이 관찰한 구체적인 것에 투영하여 암시라는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계절의 시라고도 불리는 한국하이쿠의 경우 이 구체적인 것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그때그때의 장면과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사계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계의 풍물을 표현하는 말 속에서 많은 것을 연상하기 때문에 문자 수의 몇 배나 되는 정보가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상징 기능을 구사해서 작자의 심정을 사계 그때그때의 장면과 풍경에 그 형태에 투영하여 빌리는 것이 한국하이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생을 들 수 있다. 이 사생은 메이지기의 하이쿠 혁신기에 마사오카 시키나 그 후계자인 다카하마 쿄시에 의해 소개되었다.

사생이라는 말의 어원은 서양화의 기초적 기법인 스케치에 있다. 이것을 마사오카 시키가 대상을 본 대로, 있는 그대로 말로 나타내는 기법으로서 하이쿠에 적용했다. 다카하마 쿄시가 마사오카 시키의 생각을 발전시켜 객관 사생을 주창하고 이것이 하이단의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카메라와 같이 세계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나타낸다. 회화의 스케치도 하이쿠의 사생도 작자의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을 구체화하는 기법인 것이다.

다카하마 쿄시 자신은 적어도 사생이라는 것은 자연의 대부분을 말살(抹殺)해서 일부분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주관의 작동을 인정하고 있다. 쿄시 작품 중에 한 구를 소개하면 먼 산에 햇살/ 가득 비추이누나/ 메마른 들판이라는 구가 있는데 이 구를 감상해 보면 물리적 존재로서의 풍물이라기보다 어디까지나 작자의 마음을 통해 파악된 풍물인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우리를 둘러싸는 환경을 물리적 환경과 행동적 환경으로 구분하는데 하이쿠에 그려지는 것은 후자라 할 수 있다.

사생이라는 것의 순수한 의미는 외계의 사물을 주관을 섞지 않고 충실히 옮겨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어느 사물을 의식한 순간부터 주관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초등 교육과정에서 사생을 보거나 듣거나 느낀 것을 비뚤어지거나 왜곡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 소개하고 있다. 즉 인간이 본 것, 들은 것뿐만 아니라 느낀 것을 기록하는 것도 사생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사물의 상징성을 빌어 자신의 감정이나 감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사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국하이쿠 작품 활동에 참고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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