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꽃덤불 앞에서 ― 금작화(金雀花)와 봄빛의 하이쿠
봄의 꽃은 대개 연약한 빛으로 온다. 매화는 이른 봄의 서늘함 속에서 피고, 벚꽃은 흩어짐의 예감을 안고 피며, 진달래는 산빛과 함께 번진다. 그런데 금작화(에니시다)의 노란 꽃은 조금 다르다. 이 꽃은 조용히 피기보다, 햇살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듯 피어난다. 가지마다 노란 꽃이 무리 지어 달리면, 꽃나무라기보다 작은 햇빛의 숲처럼 보인다.
사진 속 금작화는 바람 속에 있다. 꽃은 선명하지만, 화면 전체는 살짝 흔들린다. 초점이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이 흔들림이 오히려 봄의 감각을 잘 보여준다. 봄은 정지된 계절이 아니다. 새잎이 돋고, 꽃이 피고, 햇빛이 깊어지고, 바람이 부는 동안 세계는 조금씩 움직인다. 에니시다의 노란빛은 바로 그 움직임 속에서 더욱 환해진다.
금작화는 일본어로도 에니시다(エニシダ)라고 불리며, 금작화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빛 참새꽃’이라는 한자명은 꽃의 모양과 색을 매우 감각적으로 포착한다. 작은 노란 꽃들이 가지에 모여 있는 모습은 참새들이 햇살 속에 내려앉은 듯하다. 하이쿠에서 이러한 꽃은 단순한 식물명이 아니라,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빛의 밀도, 생명의 번짐, 오후의 따뜻한 공기를 함께 불러오는 계절의 말이 될 수 있다.
하이쿠는 큰 설명보다 순간의 포착을 중시한다. 따라서 금작화를 노래할 때도 “아름답다”라고 말하기보다, 그 꽃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편이 좋다. 예를 들어 노란 꽃이 피었다는 사실보다, 그 꽃 때문에 바람까지 노랗게 느껴지는 순간, 지나가는 오후가 환해지는 순간, 혹은 꽃덤불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하이쿠의 핵심이 된다.
노란 꽃덤불
바람이 지나가자
햇살도 흔들
이 하이쿠에서 중요한 것은 꽃 자체보다 꽃과 바람, 그리고 햇살의 관계이다. 금작화는 가만히 피어 있지만, 바람이 지나가면서 꽃빛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 때문에 햇살까지 움직이는 듯 보인다. 이것이 하이쿠적 감각이다. 사물 하나를 따로 떼어 보지 않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미세한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이렇게 쓸 수 있다.
노란 꽃덤불
지나가던 오후도
잠시 머물고
여기서는 금작화가 시간을 붙잡는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후 자체가 잠시 머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좋은 하이쿠는 풍경을 설명하지 않고, 독자가 그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오후’는 실제 시간이면서 동시에 정서적 시간이다. 꽃 앞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 노란빛에 물든 시간이다.
한국하이쿠에서 금작화는 아직 널리 쓰이는 계절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하이쿠는 일본 하이쿠의 계절어 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생활공간과 감각 속에서 새롭게 계절말을 발견해야 한다. 금작화가 공원, 정원, 길가, 마을의 담장 곁에서 자주 보인다면, 그것은 충분히 현대 한국하이쿠의 계절어가 될 수 있다.
계절말은 단순한 식물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계절을 어떻게 느꼈는가를 보여주는 감각의 사전이다. 옛사람에게 매화와 국화가 계절의 정신을 담았다면, 오늘의 우리에게는 길가의 금작화, 아파트 화단의 철쭉, 강변의 유채, 공원의 이팝나무도 계절의 마음을 열어주는 말이 될 수 있다.
사진 속 노란 꽃은 우리에게 말한다. 봄은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다고. 어떤 봄은 눈부시게 다가와 마음의 가장자리까지 환하게 물들인다고. 하이쿠는 그 순간을 붙잡는 짧은 그릇이다. 금작화 앞에서라면, 우리는 긴 설명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니시다여
오늘의 바람에도
노란 숨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