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하이쿠연맹 Korea Haiku Federation
하이쿠 칼럼 체호프 읽기

아무도 듣지 않는군

체호프의 무대 위에서 사랑과 침묵, 그리고 인간의 외로움을 오래 바라본 밤의 기록.

체호프 읽기 필자 오인우 2026.05.12 조회 2

아무도 듣지 않는군

검은 커튼이 드리운 극장 안은

오래된 호흡처럼 조용했다.

침묵의 무게가 객석 위에 천천히 내려앉고,

사람들은 숨조차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체호프 단편선 〈대소동〉이 시작되었다.

무대를 밝히는 조명이 천천히 켜지고

배우가 걸어 나오는 순간,

무대는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의자가 옮겨지고,

벽이 무너졌다 다시 세워지고,

불빛은 인물들의 얼굴 위를 바쁘게 건너다녔다.

나는 그 움직임 속에서

문득 오래전 누군가의 침묵을 떠올렸다.

니콜라이는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떠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사랑보다 먼저 사람을 상처 입혔다.

그는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람답게 바라보지 못했다.

방 안에는

상처 입은 말들만 오래 남아 있었다.

문턱을 넘어가던

그녀의 발뒤꿈치 소리가

아직도 방 안에 남아 있는 듯했다.

문턱 너머

발뒤꿈치 소리만

오래 남아

가정교사는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사랑이라 했지만,

그 사랑은 끝내 나를 사람으로 부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남지 않았다.

나는 그를 위해 침묵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 침묵했다.

그 고요는

내 생의 가장 또렷한 소리였다.

사랑이라니

내 이름이 아니었어

그가 부른 건

니콜라이는 끝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도… 아무도 듣지 않는군.”

그 말이 무대 아래까지 천천히 내려와

오래 가슴에 남았다.

공연을 보고 돌아온 뒤에도

나는 며칠 동안 희곡 대본을 펼쳤다 접기를 반복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왜 사람은 사랑하면서

끝내 서로를 상처 입히는가.

왜 침묵은

말보다 더 깊이 남는가.

나는 아직도

그 무대의 숨결 속을 천천히 걷고 있다.

이 사랑과 침묵을

끝까지 살아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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